Hyun Hong   WORKS. EXHIBITION VIEW. ARCHIVE. EXHIBITION. CV. CONTACT. TEXTS IN KOREAN.

 

 

작가노트 /

모던타임즈 2 / 작가노트.

사디즘 / 작가노트.

모던타임즈 3 / 작가노트.

점과 점들 / 작가노트.

모던타임즈 4 / 작가노트.

키쓰하기 좋은 곳 / 작가노트

포토그라픽 룩 1 / 작가노트.

포토그라픽 룩 2 / 작가노트.

리크스 / 작가노트.

포토그라픽 룩 3 / 작가노트

 

그 외 /

나에게 사진은 어떠한 의미인가.

모던타임즈 1 / 전시서문.

모던타임즈 3 / 전시서문.

로스트 서머 (김진호 작가) 전시서문.

아파트먼트 (김규식 작가 ) 전시서문.

신이 내리다 (김규식 작가) 전시서문.

복제의 즐거움(김규식 작가) 전시서문.

형, 또 다름 형 (이은종 작가) 전시서문.

인상주의와 포토샵.

인상주의 화가 3인의 시선.

노출과 존 시스템.

고종석 글 중에서.

어머니를 기억하며.

먼꿈.

디자인 서울.

내 친구들과 나티.

메릴 스트립과 수애.

조카 은영에게.

창훈형 홈페이지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 한편.

이방인의 방/김용민.

흑백을 묻다/김현호.

모던타임즈 작가 현홍/ 박대용.

작업을 한다은 것은.

텔 미 유어 스토리.

더텍사스프로젝트 전시서문.

봄.

89학번.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언젠가 닥칠 일.

합성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사진합성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합성은 조작이기 때문이다.

사실이 아니라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합성은 포토샵같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툴Tool로 만들어진 저급한 기술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사진대전에서 대상을 받는 작품이 합성이라는 이유로 상을 반납해야 했던 것도  다 위와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런데 내 모던타임즈 2의 사진들은 모두 합성된 것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이거 진짜예요?

 

사진합성은 이렇게 나뉠 수도 있다. 하나는 감추려고 하는 경우와 또하나는 감추려고 하지 않는 경우.

멋진 풍경사진을 하나 찍었는데, 새가 한 마리 있었으면 한다. 새한 마리가 나무위에 앉아있으면 딱 보기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새를 한 마리 포토샵으로 집어넣었다. 그랬더니 사진이 확 산다. 혼자보기 아까워 우연한 기회에 사진전에 출품했는데 그게 글쎄 대상을 받게 된다. 상금도 타고 나름 유명세도 치렀다. 그런데 이런 제보가 주최측으로 날아든다.

'나무위에 앉아있는 그새는 그지역에 서식하는 새가 아닙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 하필 그 새를... 참 재수없는 일일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 경우의 합성은 조작이 된다. 감추고 싶은 작가의 비밀이 되는 것이다. 사진은 그 시간 그 장소에서의 기록이므로 이미 촬영한 사진에 무엇인가를 조작한다는 것은 이미 사진이 아닌 것이 된다.  이것이 사진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이다.

다음은 내 작품과 같은 경우다. 사실 모던타임즈 2시리즈와 같이 적극적으로 합성을 하는 사진은 처음 시작부터가 사진이라고 하기엔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카메라를 사용하고 이런 저런 미디어에 프린트되는 다분히 사진적인 프로세스를 거치게되지만 나는 기록이라는 사진의 통념을 따르지 않았다. 대상들을 촬영한 후 합성을 해서 원하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오히려 미술에 더 가깝다.

여기서 잠깐 미술사(서양)를 생각해보자.

 

인상주의 작품들을 처음 접하게 됐던 당시의 화랑 주인들은 그 작품들을 갤러리에 걸어놓지도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건 그림이 아니므로..

왜 이런일이 일어나게되었냐면 당시의 그림은 지금의 사진처럼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그려야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대상의형태를 무너뜨리는 일은 없었으며, 색 또한 작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다. 미술사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의 한 순간으로 기록되는 인상주의의 시작은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이었며,  조용히 시작되었다. 인상파와 함께 시작되는 미술에 있어서의 모더니즘은 미술의 중심이 대상에서 작가로 넘어감을 시사한다.

대상의 충실한 재현이 아니라 작가의 주관적인 표현으로 미술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본대로 내가 느낀대로 그리고 내가 그렇게 그리고 싶다는데 뭐가 문제야.. 뭐 이런 식이다. 형이 무너지고 색이 자유로워진다. 그후로 너도 나도 그렇게 그려대기 시작하니까 자연스레 미술의 한 흐름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후기 인상파니 표현주의니 추상주의니 야수파니 초현실주의니 입체파니 뭐 다 이런것은 이름만 다를뿐 다 작가 맘대로 그린다는 뜻이다.

그랬더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오히려 그게 더 좋아보이고 뭔가 더 있어보인다. 급기야 나중엔 작품에서 아예 작가가 손을 뗀다. 재료! 니 맘대로 하세요..

유명한 잭슨 폴락의 드롭페인팅이 대표적일 것이다. 어떤 작품이 나올지 작가는 예상할 수 없는 시점에 닿게된다. 이젠 정말 별별 미술들이 다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미술인지 아닌지 궁금해질 정도로.. 보통 그런류의 작품들을 반미학, 반미술, 또는 비미술이라고 일컫는다.

이런 용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나는 동의하므로 반미학, 반미술, 비미술란 용어를 사용하겠다. 그것은 작위적으로 미술과 대칭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예술행위의 예는 매우 맞다. 폴락이 작품의 최종결과에서 손을 떼었다면 뒤샹은 아예 레디메이드를 전시해버린다. 완성된 기성품을.....어떤 작가는 캔바스를 갈기 갈기 찢어버린채 전시를 하고, 작품이 갤러리벽에 액자로 걸리는 것이 맘에 안들었던 작가들은 갤러리 벽에 바로 그림을 그려댔다. 작품이 갤러리에 있어야한다는 편견을 버려! 하던 작가들은 저 멀찌감치 자연속이나 인공물안에 작픔을 만들어 놓는다(대지미술). 급기야 왜 꼭 미술이 작품안에 있어야하지? 난 아예 작품에서 탈출할거야! 하는 작가가 생겨났는데, 그는 감상자의 (작품을 응시할때의) 시지각 단계를 아예 건너뛰고자,

눈에 보이는 작품이 아닌 글로써 작품을 만들어 전시를 했다. 수용자의 시감각을 건너뛰고 바로 인식의 단계 또는 상상력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후론 그래서 예술은 대상,작가,작품보다 보는 사람이 더 중요하게 되버렸다. 예술의 중심이 대상에서 작가로, 작가에서 수용자로 이동한 것이다. 이것이 어떤 대상을 그린거며, 어떻게 그렸으며, 누가 그렸으며 이런거 보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보통 수용미학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요즘은?  요즘엔 정말 이것 저것 다한다. 특별한 흐름은 없다. 한가지 새로운게 있다면 첨단기술을 이용한 인터액티브interactive 즉 작품과 관객이 서로 상호작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앞으로 소통을 주제로 하는 그런 작품들이 대세가 될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한가지 중요한 흐름은 돈과 미술의 결탁이다. 지금은 미술의 가치가 돈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작가의 위상 또한 돈에 의해 결정된다. 다소 복잡한 듯한 미술시장의 구조는 어디가 끝이고 어디가 시작인지 모른채 어지럽게 엉켜있는 현대 금융의 구조와 닮아있다.

매우 거칠게 정리했지만 미술사는 대체로 이렇다. 굵직 굵직한 변화들만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설명되지 않은 더 많은 것들이 뒤따르게 되있다.

더 많이 말하고는 싶지만 일단 여기서 끝..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서.. 미술보다 늦게 출발한 사진의 현재는 미술사로 말하자면 인상주의가 시작되던 모더니즘 정도에 와있는 듯하다. 있는 그대로를 찍어야하는 사진이 있는가 하면, 언제부턴가 사진을 미술의 한 재료 정도로만 인식하는 태도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은 하나의 소재가 되고 합성의 대상이 되며, 작가가 원하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통로역할쯤이 된다. 인상파 화가들이 오래전 그러했듯이, 사진을 하는 이들도 있는 그대로를 재현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게된다.  사진 역시 미술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미술의 역사를 간단히 집어보았지만, 미술을 포함하는, 사실을 그대로 베끼려고 하는 매체들의 역사는 단순한 재현으로부터 작가의 자의적이고 생산적인 창작쪽으로 진화한다. 재현이나 기록, 기계성에 바탕을 둔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비슷한 이야기지만 ,예술은 표현하고자 하는 바와 그것을 표현해줄 통로간의 부단한 변주라고도 볼 수 있다. 작가의 창작의 크기와 모양이 이미 만들어져있는 통로의 그것과 맞질 않는다면 작가는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림이든 사진이든 창작을 필요로하는 모든 예술의 장르는 언제나 형식을 무너뜨리고자 하고 재료를 넘어서려고 하며 그래서 항상 그 너머의 무엇인가에 닿으려고하는 욕망으로 변색한다.그래서, 사진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흐름이 생기면 대체로 마찰이 뒤따른다. 사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어떤이는 굳이 합성을 할거면 그림을 그리지 왜 사진을 하느냐고 물어올수 도 있다. 맞는 질문일까? 그 질문은 그림은 작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사진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나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그런한 질문의 유효기간이 이젠 끝나 버린 것이다. 또 누군가는 누구나 쉽게할 수 포토샵으로 조작하는 것은 저급한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동네 문방구만 가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그림붓이다. 모두가 붓을 쥐고 있다고해서 모두가 좋은 화가가 될 수는 없는 법. 쉽게 구하고 다룰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내느냐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사진의 이러한 흐름이 어떤이에겐 다소 못마땅하거나 아쉬울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바야흐로 사진의 모더니즘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이나 당위를 부정하는 쪽도 아니다. 사진 그 자체에서  사실(객관, 기록)을 전하려는, 또는 미적인 무엇인가를 끌어내려는 작가의 행위 또한 다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며, 그러한 과정을 거친 사진이 가지는 나름의 아름다움과 무게 역시 나는 거부할 수가 없다. 그렀다면 나의 입장은 이렇다. 난 사진이 가지는 정직함이 너무나 좋다.  하지만 그 정직에서 벗어난 거짓도 좋다. 그 거짓이 또 다른 정직을 향한 과정의 일부라면 말이다. 예술은 과학이 아닌 이유에서다.

 

사진은 머지 않은 미래엔 신뢰할 수 없는 미디어가 되리라고 난 확신한다.

지금의 사진에 대한 순수한 믿음은  사라질 것이며, 사진을 대체할 또 다른 그 무엇인가가 나타날 것이다. 예를 들자면....촬영을 하는 기계와  촬영이 되는 공간과 대상, 그리고 그 공간과 대상이 실재한다고 인증을 해주는 제 3의 어떤 시스템(위성?)이 동시에

동작을 하게 되는 것?  그래서 촬영을 하게되면 그 유령과도 같은 데이터망이 촬영된 그 무엇인가가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인증값을 촬영기에 전송을 하게된다. 이미지가 아니라 대상과 공간의 좌표와 고유한 코드, 그리고 시간값이  지금의 사진을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사진에 대한 믿음을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

뭐 나만의 상상?

 

이글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소재나 재료, 딱딱한 기계와 손에 익은 과정은 작가의 부드러운 시선과 창의력보다는 약 반계단 아래에 있어야 한다.